못을 박아놓는 사실이 있어요. 저는 조디악을 논하기에는 부족한 평자입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이 영화에 대해 쓰지 않았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디악>에 대해 글을 쓰기로 결심한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이 영화가 핀처의 팬들에게도 다소 지루한 영화 취급을 받는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세븐>과 <파이트 클럽>을 보고 핀처의 팬이 되신 분들이라면 이 영화는 다소 밋밋하게 느껴질지도 모릅니다. 혹은 핀처의 후기작인 ‘소셜네트워크’나 ‘나를 찾아줘’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서사의 목적이 없어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조디악’은 핀처의 어떤 영화보다 많이 알려져 논해야 할 작품이자 다른 걸출한 영화들까지 뛰어넘는 성취를 보여준 걸작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조디악’에 대한 좋은 비평이 거의 없다는 사실입니다. 일단 제가 본 것 중에서는 의미 있다고 할 만한 문장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만큼 조디악은 까다로운 영화입니다. 그것은 <조디악>이 어렵다는 뜻도, 복잡하다는 뜻도 아닙니다. 이 영화를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이 영화에서 무엇을 따라가야 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결국 대다수의 ‘조디악’ 비평은 이 영화에서 무엇을 따라가야 할지 놓치고 있습니다. 마치 영화 속 살인마 조디악을 끝내 밝혀내지 못한 것처럼 말입니다. <조디악>의 소재가 된 살인마 조디악은 4건의 공식적인 살인으로 5명을 죽이고 2명에게 중상을 입혔습니다. 많은 연쇄살인범들이 그랬던 것처럼 조디악도 언론의 관심과 함께 경찰을 놀리는 것을 즐겼습니다. 그는 사람을 죽이는 것이 즐거웠고, 자신이 죽인 사람들이 천국에서 자신의 노예가 될 것이라고 경찰에 보낸 편지에서 말했습니다. 그에게 연쇄살인이란 영혼의 수집과 같았습니다. 여기서는 마치 악마와 같은 오컬트적 광기가 묻어납니다. 경찰은 집요한 수사 끝에 용의자를 특정하기까지 했지만 첫 사건이 발생한 것이 1968년인데도 현재까지 진범은 잡히지 않고 있습니다. 즉 ‘조디악 킬러’는 영구 미제 사건의 범인입니다. 핀처는 이 조디악 킬러의 이야기를 인습적인 극적 구조로 다듬지 않고 르포르타주처럼 다루고 있습니다. 실제로 범인이 잡히지 않는 또 하나의 연쇄살인극인 <살인의 추억>이나 핀처의 전작인 <세븐>과 비교하면 <조디악>의 서사는 느슨하기는커녕 방만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핀처가 조디악 킬러에 대한 르포적인 영화를 만들려고 했다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핀처가 극적인 구조를 최대한 배제한 이유는 다른 곳에 있습니다. 핀처는 과거 스필버그의 ‘조스’에 대해 이야기하며 이 영화가 사람들이 바다에 들어가는 것을 두렵게 했다며 그래서 ‘조스’가 위대한 작품이라고 평가했습니다. 핀처의 저평가가 의미심장한 것은 그것 또한 인간이 가진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서사 작동에 있어서 중요한 기제로 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븐>과 <파이팅클럽>을 통해 MTV의 총아라는 평가를 얻은 핀처는 <조디악>을 기점으로 ‘악’에 대한 규정과 함께 그것을 보여주는 방식을 바꾸고 있습니다. 그것은 결국 스릴러로서의 작동 기구에도 변화가 있음을 의미합니다. <조디악>이 핀처의 전작인 <세븐>에 비해 극의 진행과 편집이 극히 느린 것은 더 빨라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핀처는 더 이상 극작법과 영화적 테크닉으로 이 악이 얼마나 무섭고 무서운지 호들갑을 떨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악은 그 존재 자체로 우리를 두렵게 하기 때문입니다. <조디악>은 ‘악의 본질’에 대한 핀처의 한층 발전된 대답입니다. <세븐>이 그 자체로 걸작일 뿐만 아니라 스릴러를 써보려는 많은 창작자들에게 레퍼런스로 작용하는 것과 달리 <조디악>은 대중적 호응을 유도하는 데는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그 분석도 충분히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앞서 말했듯이 이 영화가 인습적인 극적 구조를 따르지 않고 극에서 무엇을 쫓아야 하는지 쉽게 밝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극적 구조라는 것은 결국 인과성이라는 벽돌로 만들어집니다. <세븐>이 ‘연쇄살인 수사’라는 명확한 목표에 따라 장면을 인과적으로 배치했다면, <조디악>은 장면과 시퀀스를 인과성 사슬만으로 연결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조디악>은 보면 서사의 흐름을 기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범인은 누구인가?’라는 쟁점이 중요해지는 범죄 스릴러물에서 극적인 구조를 포기했다는 것은 결국 범인이 누구인지 관심이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핀처가 그 질문에 답하기를 포기한 것은 단순히 조디악 연쇄살인사건이 미해결 사건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포기를 통해서만 답할 수 있는 질문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악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입니다. 핀처가 ‘우리는 범인이 누구인지 모른다’를 통해 ‘악이란 무엇인가’를 말하려 한다는 가설을 받아들인다면, <조디악>의 서사는 저이율배반적인 명제를 성립시키기 위해 구성되어 있습니다. 영화는 69년에 시작되어 91년을 기점으로 끝날 때까지 많은 자막으로 시간의 흐름을 알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특이한 점은 ‘X년 후’ 내지는 ‘X월, X주 후’라는 자막이 사용될 뿐 현재가 몇 년도인지는 시작할 때와 끝날 때만 알리고 있습니다. 시간의 흐름 자체에 대해서는 ‘X시간 후’라는 자막까지 사용할 정도로 집요하고, 정작 ‘현재가 언제인지’는 잊게 만드는 겁니다. 그래서 <조디악>을 보고 있으면 시간 감각이 사라집니다. 핀처는 이러한 연출을 통해 관객들이 20년이 넘는 긴 수사와 추적의 세월을 떠도는 유령이 되도록 합니다. 주인공 그레이스미스와 폴 에이버리가 조디악이라는 유령을 쫓아가면서 그들 자신도 점차 유령이 되어가듯이 관객 또한 <조디악>을 보며 유령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영화가 중반이 되면 리 앨런이라는 인물이 유력한 용의자로 떠오릅니다. ‘조디악’은 이 순간을 기점으로 진행 리듬에 약간의 박차를 가합니다. 핀처는 관객도 리 앨런이라는 인물을 의심하도록 연출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리알렌이 조디악일 수 있다는 믿음을 주는 정황 증거는 많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리 앨런이 조디악이라고 단정할 직접적인 증거는 하나도 없습니다. ‘너무 의심스러운 인물’과 상반되게 ‘철저하게 부재하는 증거’는 그저 우연이라거나 살인마의 치밀함으로 넘기기가 어렵습니다. 필적감정사는 “조디악의 편지 필적과 리 앨런의 필적이 못을 박아두는 사실이 있습니다. 저는 조디악을 논하기에는 부족한 평자입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이 영화에 대해 쓰지 않았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디악>에 대해 글을 쓰기로 결심한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이 영화가 핀처의 팬들에게도 다소 지루한 영화 취급을 받는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세븐>과 <파이팅클럽>을 보고 핀

